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산마르코 대성당 (문단 편집) === 전리품 혹은 약탈품 ===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[[하라는 공부는 안하고|가라는 성지는 안 가고]] [[콘스탄티노폴리스]]를 공격해 함락시킨 십자군은 막대한 재화와 보물들을 약탈했고, 약탈품들은 베네치아로 흘러들어왔다. 이때 유입된 유물의 일부가 산마르코 대성당을 장식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. 대성당의 내부에 깔린 대리석 판석들도 [[하기아 소피아]]에서 이때 뜯어온 것들이다. 이때문에 대성당을 장식하고 있는 대리석 판석들과 조각상들이 대성당 자체보다 훨씬 더 오래된 경우가 많다. ||<-2><#DCDCDC> '''콰드리가(La Quadriga)''' || || [[파일:external/3.bp.blogspot.com/IMG_7823.jpg|width=100%]] || [[파일:external/cache.virtualtourist.com/3958458-The_Four_Horses_of_Saint_Mark_Venice.jpg|width=100%]] || ||<-2>[[청동]]으로 제작된 4마리의 말 조각상이다. '콰드리가(quadriga)'란 [[고대 로마]] 시대에 [[전차경주]] 때 사용된 4두 2륜 전차를 뜻하는 단어이다. 산마르코 대성당의 콰드리가는 원래 [[테오도시우스 2세]] 황제 때 그리스의 히오스 섬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져온 것으로, 수도의 대전차경기장 히포드로무스(hippodromus)를 장식하고 있었다. 그러나 1204년 [[제4차 십자군 원정]] 때 약탈당해 베네치아로 옮겨졌으며, 1254년부터는 산마르코 대성당의 정면 위쪽 테라스에 놓여 '산마르코의 말(Cavalli di San Marco)'로 둔갑했다. [br]6백년 가까이 산마르코 광장을 내려다 보던 콰드리가는 1797년 [[베네치아 공화국]]이 멸망하면서 [[프랑스군]]에게 약탈당해 파리로 옮겨졌다. [[나폴레옹 보나파르트]]는 1808년 자신이 그동안 거둔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[[파리(프랑스)|파리]] [[루브르]] [[궁전]]의 안뜰인 카루젤 광장 중앙에 카루젤 [[개선문]](Arc de Triomphe du Carrousel)을 세웠는데, 산마르코 대성당에서 약탈한 콰드리가를 이 개선문 윗부분에 올려놓았다. [br]나폴레옹이 패망한 후 1815년에 베네치아로 돌아온 콰드리가는 다시금 대성당을 장식해 1980년대 초까지 자리를 지켰지만, 가속화 된 대기오염으로 인해 청동이 부식되는 등 손상이 심해지자 유물 보호를 위해 복제품(왼쪽 사진)으로 교체하고 진품(오른쪽 사진)은 산마르코 대성당 내부 2층의 박물관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. 참고로 콰드리가 진품이 전시된 곳 성당 2층에서는 황금빛 프레스코화를 굉장히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. || ||<-2><#DCDCDC> '''[[사두정치|사두정의 네 황제들(The Tetrarchs)]]''' || ||<-2> [[파일:external/mightymac.org/12europe095.jpg|width=575]] || ||<-2>[[이집트]]산 자주색 반암으로 만들어진 조각상으로, 293년부터 313년까지 이어진 제1차 사두정의 정제 [[디오클레티아누스]], [[막시미아누스]]와 부제 [[갈레리우스]], [[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]]를 묘사한 것이다. 원래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필라델피온 궁전에 있었으나 1204년 [[제4차 십자군 원정]] 때 약탈해왔다. 약탈당할 때 발 한 쪽이 깨져 사라졌는데, 20세기에 들어와 기적적으로 [[터키]]에서 사라졌던 그 조각이 발견되었다. 이에 베네치아에서 발 조각을 돌려(?)달라고 하자 ~~훔쳐가놓고 돌려달라는 위엄~~ 터키에서는 발 조각만이라도 갖고 있겠다며 베네치아의 요구를 거부해 현재 터키 [[이스탄불]]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. || ||<-2><#DCDCDC> '''팔라 도로(Pala d'Oro)''' || ||<-2> [[파일:external/1.bp.blogspot.com/pala-d%2527oro.jpg|width=575]] || ||<-2>높이 2.21m, 너비 3.34m인 팔라 도로는 [[이탈리아어]]로 '황금 장막'을 의미한다. 처음에는 제단의 장식으로 전면에 거는 안테펜디움(Antependium)이었지만 현재는 산마르코 대성당의 내진에 봉안되어 있다. 팔라 도로는 위쪽과 아래쪽이 결합된 형태인데, 976년 프에트로 1세 오로세올로의 명령으로 동로마 제국에서 온 장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시초로 아래쪽 부분은 1102년 제34대 도제 오르델라포 팔리에르(Ordelaffo Falier)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공방에 주문한 것으로 [[복음사가 마르코스|복음사가 마르코]]의 일생, [[베네치아 도제]]의 초상화, 옥좌에 앉은 전능하신 [[예수|그리스도]](Pantocrator) 등의 형상이 법랑으로 묘사되어 있다. 위쪽 부분은 대천사 [[미카엘]] 등을 묘사했는데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약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. [br]1343년 제54대 도제 안드레아 단돌로(Andrea Dandolo)는 아래쪽과 위쪽 두 부분을 하나로 합쳐 고딕 양식의 황금 골조를 바탕으로 [[루비]], [[사파이어]], [[에메랄드]], [[진주]], [[자수정]] 등의 보석 1,927개를 박아 화려하게 장식했다. 또한 안드레아 단돌로는 화가 파올로 베네치아노(Paolo Veneziano)에게 팔라 도로를 가리는 제단화 패널을 그리도록 명령해 교회의 [[전례]]가 거행될 때만 패널을 열어서 대중이 팔라 도로를 볼 수 있게 했다. 파올로 베네치아노가 그렸던 제단화는 15세기에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교체되었고, 오늘날에는 항상 열어놓고 있어서 전례가 없더라도 언제나 팔라 도로를 구경할 수 있다. ~~물론 돈을 낸 사람만 가능...~~ ||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